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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팁버키

[스팁버키] Happy days

by 천수 2018. 9. 25.
카엘에게 달성표 보상으로 주기로 해놓고 민망하게 묵혀버린 것. 키워드는 개, 소풍.
시빌워 이후의 언젠가- 이지만 스포는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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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났을 때 개는 그들의 팔뚝보다도 작았다. 걸음마를 뗀 지도 얼마 안 된 어린 개에게 그들은 세상만큼 커보였고, 솔직히 조금 무섭게 느껴졌다. 사람 입장에서는 덩치 큰 남자들이 강아지들 앞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게 귀여워 보였다는 사실은 개가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어때, 캡? 맘에 드는 녀석 있어?"

"글쎄. 내 눈엔 다 귀여운데. 사실 생각보다 훨씬 작아보여. 몇 개월이라고 했지?"

"3개월 되어가요. 보통 이때쯤 좋은 집 찾아 보내죠. 그나저나 직접 와주실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요."

"가족이 될 녀석이니 당연히 마중 와야지. 귀한 식구를 보내주는 부모에게 인사도 해야 하고."

"어휴, 캡틴 아메리카가 우리집 강아지를 데려간다면 이쪽에서 영광이죠. 이따 사진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밝은 색으로 이루어진 남자는 싱긋 웃으며 그러자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에게서 가장 밝은 눈은 그때까지 아무 말 없이 개를 들여다보고 있던 남은 한 남자에게 돌아갔다.

"어때, 버키? 누가 좋을 것 같아?"

어두운 머리와 밝은 눈, 밝은 피부의 그 남자는 아무 말도 못 들은 것처럼 조용했다. 놀라울 정도였다. 아직 어려도 개의 귀와 코는 충분히 제 역할을 해내고 있었는데, 그 조용한 남자는 숨소리조차 들릴락 말락했다.
대신 옆의 밝은 색 남자나 짙은 색 남자에게는 없는 독특한 소리가 있었다. 왼쪽 팔에서 나는 낮은 떨림소리, 작은 조각들이 스치는 소리. 그리고 가죽 장갑을 넘어 코로 스미는 차고 단단하고 반짝거리는 것의 냄새. 개는 호기심을 숨기지 않았고, 그 결과로 주위의 남자들을 웃게 했다.

"어, 이 녀석 봐. 반즈. 당신 왼손이 먹을 건 줄 아나봐."

"……."

"왜 그러지? 장갑 때문에 그러나? 가죽 냄새?"

"슬슬 또 이가 간지러운가봐요. 요즘 이것저것 깨물고 난리거든요. 소파며 장난감이며 남아나질 않아요."

"아하, 그래서 매기가 울상이었구나? 어, 어, 잠깐, 이 녀석들! 야!"

개의 꼬리가 살랑이는 것을 보았는지, 아직 덜 여문 이빨에 남자의 장갑 가죽이 긁히는 소리를 들었는지, 갑자기 몰려드는 강아지들은 덩치 큰 남자들을 당황하게 했다. 방금까지도 멀뚱히 개를 내려다보던 조용한 남자는 화들짝 팔을 들었고 색 밝은 남자는 그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가장 말이 많던 색 짙은 남자와 집주인이 재빨리 개와 형제들을 양팔로 쓸어 안았다.
색 짙은 남자의 체온 높은 팔에서 꼼지락거리며 개는, 색 밝던 남자가 조용하던 남자의 앞을 가리듯이 서서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괜찮아? 많이 놀랐어?"

"……별로. 어차피 강아지잖아."

혼잣말처럼 대답하면서도 그의 눈과 오른손은 물어뜯기던 왼손에 서성거리고 있었다. 색 밝던 남자는 그 두 손을 잡으려다가 멈칫하더니, 이제 흔들림이 많아진 남자의 어깨를 잡고 두어번 가볍게 두드렸다. 등을 돌리고 있어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목소리가 더 낮아진 것은 알 수 있었다. 조용했던 남자는 그 말에 마찬가지로 웅얼거리며 가볍게 고개를 흔들고, 또는 끄덕이고, 어깨를 들썩였다.

개는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궁금했지만 더 지켜볼 수가 없었다. 집주인이, 강아지가 밥때가 된 모양이라며 개와 형제들을 다른 방으로 보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마음이 끌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날, 개가 형제들과 뒤엉켜 어미 곁에서 사료를 삼키는 동안 집주인과 세 남자는 의논을 마쳤다. 며칠 후, 개는 다시 찾아온 조용한 남자에게 안겨 그때까지 살던 집을 떠났다.

색 밝은 남자가 새 것임이 분명한 커다란 가방을 들고 있는데도 그들은 가방을 무겁게 하고 팔을 편하게 하기보다 품 안에서 꼬물거리는 강아지를 들여다보기를 택했다. 어미의 냄새가 멀어지자 개는 본능적으로 두려워했지만, 얼마 못가 조용한 남자의 심장 소리와 찰칵거리는 왼팔 소리에 정신이 팔렸다. 단조롭고 박자가 맞는 두 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니 개는 어느 순간 잠들어버렸다. 저를 보며 웃음을 머금는 두 남자의 얼굴은 미처 보지 못한 채.

아쉬워할 건 없었다. 그 뒤로도 두 남자는 개의 몸짓 하나, 울음소리 하나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며 다양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그동안 개는 천천히 저의 새 가족에 대해 배워갔다.

색 밝은 남자의 이름은 ‘스티브’였다. 묵직한 목소리에 말투와 행동이 확실했다. 개에게 생활의 규칙을 가르친 것도 주로 그였다. 개가 규칙을 잘 따를 때는 웃으며 칭찬해주었지만 잘못을 했을 때는 엄격하게 다잡아서 조금 무서웠다. 가장 인상적인 건 특이할 정도로 힘이 세다는 사실이었다. 개가 꽤 커진 뒤에도 강아지 때와 별 차이를 못 느끼는 듯이 들어 안고는 했는데, 그때마다 더운 체온이 확 느껴졌다. 남들보다 더 강하게 뛰는 심장 때문인 듯했다. 실제로 개는 그가 지치는 걸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스티브가 늘 지켜보며 챙기는 소리 낮은 남자는 ‘버키’였다. 개가 처음 보았을 때부터 궁금해했던 왼팔의 정체는 금속으로 만든 의수였다. 아직 뭘 몰랐던 개가 장난삼아 그 손끝을 깨물었다가 깜짝 놀랐을 때, 버키는 그러잖아도 큰 눈을 더 크게 뜨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개의 입안을 벌려 살폈다. 나직한 목소리로 건네지는 말소리가 다정해서 개는 그가 사실 매우 세심하다는 걸 금방 느낄 수 있었다. 개가 스티브에게 혼이 나서 시무룩해 있으면 몰래 간식을 더 챙겨주다가 들통나는 것이 버키였다.

개가 온 첫날 그들은 진지하게 개를 들여다보며 여러 말들을 내뱉었는데, 그게 강아지의 이름을 정하는 토의였다는 건 좀 더 커서 이해했다. 결과적으로, 개는 ‘해피’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꽤 나중에 ‘토니’라는 사람이 찾아와 듣고서는 입술을 삐죽이며 나무라기도 했지만 개는 가족들이 그 이름을 정말 좋아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사는 집은 가구가 많지 않아 공간이 널찍널찍했다. 해피가 짧은 다리로 마음대로 뛰어다니면 그들은 때로는 웃었고, 때로는 뒤쫓아와 해피를 안아들었다. 자주 쫓아오는 쪽은 스티브였지만 더 빨리 손이 닿는 쪽은 버키였다. 해피가 아직 어렸을 때는 근소한 차이로 동시에 손을 뻗다가 해피는 빠져나가버리고 둘이 뒤엉켜 넘어지기도 했다. 크고 무거운 사람들이 쓰러지는 소리에 놀라 돌아보면, 스티브와 버키는 끙끙거리며 일어나서는 서로를 마주보며 어이없어하다 웃어버렸다.

일상은 대체로 온화했다. 셋이 서로에게 잘 맞추기 때문이었다. 스티브는 일과를 규칙적으로 진행했고 별다른 상벌이 없어도 버키와 해피는 그 사이클을 잘 따르는 편이었다. 허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느긋한 리듬에도 변주가 늘어갔다. 해피의 몸과 머리가 커가는 동안 버키 역시 소리 낮은 남자에서 소리내어 웃는 남자가 되어갔기 때문이다. 자기 주장이 강해진 두 가족이 졸라대기 시작하면 아무리 완고한 스티브라도 못 이기는 척 넘어와주는 일이 많았다. 그렇게 아웅다웅하는 나날은 결코 지루하지 않았다.

다만 가끔씩, 모든 것이 조심스러워지는 때가 있었다.

‘그것’은 모두가 잠들어있던 한밤중에 시작되곤 했다. 스티브와 버키는 낮에는 각자의 방에서 일을 보아도 별일이 없는 한 밤에는 함께 잤다. 대개는 스티브 방인데 내키는 대로 버키 방이나 아예 거실에서 잘 때도 있었다. 어디에서든 가장 먼저 낌새를 눈치채는 것은 해피였다. 공기를 타고 가냘프게 전해지는 앓는 소리, 희미하게 풍기는 땀냄새, 뒤척이는 기척. 그런 것들이 점차로 버키의 울음소리와 몸부림으로 뚜렷해지는 과정을 해피는 몇번이고 보고 들었다.

그러나 해피가 도울 방법은 없었다. 해피로서는 버키가 왜 그러는지도 몰랐고, 어떻게 진정시켜야 할지는 더더구나 알지 못했다. 같은 방에 있다면 그저 함께 울며 불안하게 버키의 곁을 맴도는 게 전부였다. 허나 그도 오래 가지는 못 했다. 어느샌가 깨어난 스티브가 순식간에 해피를 안아 황급히 다른 곳으로 옮겨 놓고 문을 잠가버리기 때문이었다.

벽 너머에서 이어지는 일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스티브가 꾸준히 버키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깨우려 애쓰고, 겨우 정신을 차린 버키가 스티브를 알아보면 둘은 서로 부둥켜안고 내내 서로의 이름과 해피로서는 알지 못할 그들만의 이야기를 나누며 오랫동안 밤을 지새웠다. 그런 때 버키는 겁에 질린 아이처럼 숨죽여 오래 울었다. 그리고 아침이 오면 격리했던 문을 열고, 바로 달려드는 해피를 꽉 끌어안아준 후, 별 일 아니었다는 듯이 웃어주었다. 그 날 하루는 평소보다 더 부산하고 더 자주 웃고 모든 행동이 더 크고 시끄러운 버키를 볼 수 있었다.

반면 둘째는, 버키가 울지는 않았다. 스티브가 버키를 깨우는 것까지는 같았지만 그 결과로 살과 살, 또는 살과 다른 무엇이 부딪치고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와 충격이 격렬하게 이어졌다. 때로는 쇳소리도 함께였다. 처음 그 소리를 들었을 때, 그리고 다음날 상당히 변해버린 벽 너머 풍경을 직접 확인했을 때 해피는 스티브가 왜 자신을 그 자리에 있지 못하게 했는지 이해했다. 버키는 적어도 하루는 자기 방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안 했고 나오더라도 해피를 가까이 두진 않으려 했다.

그리고 셋째가 있었다. 가장 드물지만, 가장 무서운 경우. 스티브가 아무리 이름을 부르고 몸을 흔들고 뺨을 때려도 버키가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의식을 못 찾는 버키를 붙들고 분투하던 스티브가 어딘가로 급히 전화를 하면, 곧 몇 사람이 찾아와 스티브와 버키를 데려갔다. 홀로 남겨진 해피에게는 아침에 스티브의 친구 중 누군가가 찾아와 문을 열어주고 먹을 것을 챙겨주었다. 대개는 '샘'이었고, 어느 날은 '나타샤'나 '완다', 또는 '샤론'이 오기도 했다. 해피 앞에서는 놀라울 만큼 공통적으로 밝은 표정과 목소리를 가장해도 해피는 그들에게서 풍기는 긴장감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셋째는 상황이 가장 오래 지속되는 경우이기도 했다. 스티브와 버키는 몇날 며칠을 떠나있다가 한층 그늘진 얼굴로 돌아왔다. 해피가 꼬리를 저으며 달려가면 버키는 창백해진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띄우며 무릎을 꿇고 해피를 가득히 안아주었다. 그리고 그 뒤에 선 스티브는 해피가 아는 한 가장 지친 얼굴을 하고 있다가 마찬가지로 희미하게 웃어주었다. 그 뒤로도 한동안은 버키도 스티브도 소리 낮은 남자가 되고는 했다.

언젠가, 버키가 없이 스티브만 먼저 돌아온 적이 있었다.

해피가 달려가자 스티브는 아주 낯선 것을 보듯이 멀거니 내려다보더니 조금 뒤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힘이 하나도 없어 느리고, 무거운 손길이었다. 터덜터덜 걸어 버키의 방으로 간 스티브는 가방에 옷가지를 조금 챙기고 다시 터덜터덜 자기 방으로 가 같은 일을 반복했다. 그리고 두 가방을 물끄러미 보다가 발을 조금 끌며 주방으로 와 물을 들이켰다. 해피의 밥과 물을 확인해 채워놓고, 집안을 돌아보고, 가방을 다시 확인하고, 방을 둘러본 뒤, 마침내 다시 문 앞에 설 때까지의 모든 행동이 그러했다.

해피는 그런 스티브가 걱정스러웠다. 그리고 서운하기도 했다. 버키를 두고 혼자 온 그가. 그리고 이제 자기를 두고 또 혼자 가려는 그가. 버키는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궁금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말해주었으면 했다.

그래서 문앞에 오래 서 있는 스티브에게 다가가 그 발 앞에 앉았다. 여전히 표정이 없이 서 있던 스티브가 그 기척에 해피와 눈을 맞췄다.

둘은 한참을 마주 보았다.

해피는 계속 기다렸다. 스티브가 이 행동을 이해해주기를 바라며. 자신이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며.

마침내 스티브는 천천히 몸을 숙였다. 두 무릎을 꿇은 그가 두 손으로 해피의 얼굴을 감싸고 두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해피도 스티브의 눈을 보았다. 밝고, 강렬한 푸른 빛에 그날따라 초록색이 짙게 번져 있었다. 문득 그 색이 버키의 눈과 비슷해보였다.

그 눈에서 투명한 물이 흘러내렸다. 한 줄, 두 줄, 창문에 떨어진 비의 시작처럼 내리긋더니 스티브가 해피를 바짝 당겨 안았다. 뺨과 머리를 부비는 스티브의 턱이 가늘게 떨었다. 해피는 곧 그가 자꾸만 중얼거리는 소리를 알아들었다.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버키도 나도 포기 안 할 테니까. 다시 돌아올 거야. 그렇게 믿어. 난 절대 놓지 않아..."

해피가 스티브의 눈물을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다. 물론 버키가 그 날 이후로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몇 번인가 가슴이 덜컥거리는 순간이 더 있었지만, 스티브는 우는 대신 해피를 끌어안고 묵묵히 자신을 추슬렀다. 가끔 둘이서 잠드는 날이면, 스티브는 잠들기 전까지 해피를 다독이며 옛날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버키와 그가 어떤 사이였는지.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안 될 만큼 약했던 그를 버키가 어떻게 지탱해줬는지. 그 버키가 어째서 나쁜 계획에 휘말려 병들게 됐는지. 버키를 되찾기 위해서 스티브가, 또 버키 자신이 얼마나 힘든 싸움을 해야 했고 지금도 어떤 노력을 쏟고 있는지.

"많이 나아졌어. 발작도 줄어들었고, 신체 반응도 예전보다 안정됐어. 버키도 그러더라, 아직 정상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버틸 만은 하다고. 빨리 집에 가서 너랑 놀아주고 싶다고. 버키 전화에 네 사진 많은 거 아니, 해피?"

이제 해피는 그 끈기와 희망이 스티브의 심장에서 비롯되는 가장 강한 힘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그리고 스티브의 희망에 부응한 것은 버키의 가장 깊은 상냥함이라는 사실도.

나이를 먹어가며 인간의 표현을 더 잘 이해하게 될수록, 해피는 그들 사이의 깊고 짙은 유대를 호흡으로 느꼈다. 스티브와 버키는 서로를 깊이 사랑했고 그 애정이야말로 그들 자신과 상대방을 북돋워주는 원동력이었다. 그들은 상대방을 지키기 위해서는 최소한 자기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는 성숙한 인간이었다. 스티브는 결코 자신의 피로에 짓눌려 버키를 재촉하지 않았다. 버키 역시 자신의 고통에 매몰되어 스티브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들은 늘 마음의 손끝이 닿아 있었고, 그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해피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도 잊지 않았다.

서로를 안고 밤을 지새던 버키와 스티브는 점차로 해피를 그들 사이에 끌어안는 일이 많아졌다. 말없이 시선과 체온을 나눌 때, 셋은 숨결마저 서로를 닮아갔다. 해피는 두 사람의 심장 박동에 맞추어 잠드는 그 시간을 무척 좋아했다. 버키가 한창 아플 무렵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버키는 자신을 다스리게 되었고, 해피를 옆에 두는 시간도 늘어갔다. 처음에는 오른쪽에만, 그리고 점차로 왼쪽에도. 해피는 그것이 좋은 조짐이라고 생각했다. 버키는 이제 자신을 충분히 안전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고 그 사실은 스티브를 무척 기쁘게 했다.

그리하여 어느 봄날, 그들은 만장일치로 근처 공원으로 소풍을 나갔다. 경치가 좋은 공원 내에서도 스티브가 예전부터 눈독 들였던 크고 높은 나무 밑에 자리를 잡았다. 스티브는 적당히 힘조절을 해가며 해피에게 공을 던져줬고 버키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그 둘을 찍어 댔다. 나중에는 아예 해피와 공 잡아오기 경쟁을 벌였다. 어이없어하며 웃던 스티브도 던지는 역을 버키에게 넘겨주더니 못지 않게 열심히 공을 쫓아다녔다. 스티브가 세 번 연속 공을 가로채자 약이 오른 해피는 스티브의 등을 덮쳤다. 이제 어엿한 성견이라 꽤 무게가 나가서, 불의의 습격을 당한 스티브는 휘청거리다 넘어지고 말았다.

한참을 뛰고 놀다 보니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허기가 느껴졌다. 먹성 좋은 입이 셋이나 있다 보니 아침에 신나게 싸온 도시락은 빠르게 사라졌다. 소화를 시키는 동안 해피는 나무 주변을 탐색했다. 스티브는 크로키북에 해피, 버키, 주변 풍경 등을 끄적거렸다. 그림을 기웃거리던 버키는 이내 졸리다며 꽃그늘에 누웠다. 스티브가 웃으며 버키의 누운 모습을 그리기 시작하자 버키는 모델료를 내놓으라고 농을 던졌고 잠깐의 협상 결과 스티브는 아이스크림을 사오겠다며 일어섰다. 버키는 잠든 사이에 잃어버릴세라 해피를 불러 왼팔로 단단히 안고 다시 눈을 감았다.

따스한 바람을 맞아 꼬리를 흔들던 해피도 이내 버키의 왼 가슴에 귀를 댄 채 졸기 시작했다. 잠결에 해피는 어릴 적 버키에게 안겨 오던 날을 떠올렸다. 의수의 찰칵거리는 소음과 고요히 뛰는 심장 박동이 이루는 화음을 들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건 그들이 서로를 선택한 순간의 소리였다.

동시에 그 소리와 진동 때문에 기계 의수를 냉장고로 착각했던 것이 함께 떠올라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는 때였다. 습관처럼 해피의 등을 다독이던 버키가 문득 입을 열었다.

“벌써 4년이 넘었구나. 너랑 같이 산 게.”

해피는 반사적으로 귀를 기울여봤지만 스티브가 다가오거나 대답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러면 '너'는 해피를 가리킬 터였다. 눈을 뜨고 버키를 볼까 했지만 그러기에는 등에 닿는 손길이 너무 나른했다. 대신 듣고 있다는 표시로 코를 울렸다. 비록 잠꼬대로 보였는지 몰라도, 적어도 그 덕분에 버키는 계속 말할 용기를 얻은 듯 했다.

“샘이 권해주긴 했지만 사실 자신 없었어. 식물이면 몰라도, 돌발 행동 가능성이 훨씬 큰 동물을 데려온다는 게 너무 위험하게 느껴졌거든. 스티브는 같이 싸우기라도 하지, 팔뚝 만큼도 안 되는 너희들을 보니까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잘못되어버릴 것 같아서... 무서웠어. 그래서 못 하겠다고 말할 뻔 했는데.”

해피의 콧등으로 꽃잎 하나가 내려앉았다. 동시에 새큼한 냄새가 났다. 간지러워 콧잔등을 찡그리자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버키가 손끝으로 톡 쳐서 떨어뜨려 주었다. 그러더니 해피의 턱 밑을 긁어주었다.

“그래, 이 입. 이 입 때문에 결국 널 데려왔지. 겁도 없이 막 깨물고 말이야.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네가 그때 너무 작아서 망정이었지 더 꽉 물었으면 이빨 나갔다, 알아? ...아무튼, 그래. 이 팔에 거부감도 안 느끼는 거 같고, 뭔지 나서서 알아보려고도 하고. 그러는 게 더 대범하고 영리해 보여서 너한테 마음이 가더라."

턱 밑을 긁던 손이 이마로 올라와 머리를 몇 차례 쓸어주었다. 따스한 체온에 해피는 저절로 머리를 부볐다. 버키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물론 아슬아슬할 때도 많았지만... 다행히 스티브가 널 잘 챙겨줬지. 그 녀석도 힘들었을 거야. 나도 봐야 하고 너도 봐야 하고. 그래서 참 미안했는데. 불현듯 미안해만 한다고 될 게 아니란 걸 깨달았어. 그 난리를 피우고, 혹시 너나 스티브가 다칠까 봐 방구석에 틀어박혀도, 너희가 늘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오래 입원했다가 돌아오면 네가 그렇게 반가워하며 달려드는 걸 보니까.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들더라."

뺨을 가볍게 두드려주고, 버키는 해피를 당겨 안았다. 

"널 절대 다치지 않게 하자. 외롭게 하지 말자. 계속 기다려주니까 반드시 돌아오자... 그렇게 마음먹으니까, 신기하게도 머리가 맑아지는 거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되려고 하는지, 비로소 중심을 잡을 수 있었어."

뺨과 뺨을 맞대고, 목과 목을 엇갈려 놓고, 버키가 한 번 깊게 숨을 쉬는 것이 느껴졌다. 호흡은 평온했고 나지막한 속삭임은 담담했다.

"그러니까... 고마워, 해피. 아픈 일 없이 이렇게 잘 자라줘서. 이렇게 환하고 맑은 날 햇빛 속에 나올 용기를 내게 줘서. 널 데려온 건 정말 잘한 일이었어."

해피는 더 이상 시치미를 뗄 수 없었다. 바둥이며 버키의 가슴과 어깨를 딛고 올라가 얼굴을 핥아 댔다. 버키는 웃음을 터뜨리며 오른손으로 해피의 머리를 짓궂게 쓸어 댔다. "이럴 줄 알았어. 너 이 녀석, 여태 자는 척 했지!" 추궁을 피해 해피는 아예 버키 위에 엎드려버렸고 버키는 짐짓 무거워 죽겠다며 땅바닥을 쳐댔다. 조금 뒤 돌아온 스티브는 그때까지도 아웅다웅하고 있는 둘을 보고 피식 웃었다.

"나 심부름 시켜 놓고 둘만 뭐가 그렇게 재밌어?"

"안 알려줘. 아이스크림은?"

"여기."

"오래 걸렸네. 아이스크림 만들어서 오는 줄 알았어."

"반은 맞아. 가게에 사람이 많더라고. 아이스크림 새로 꺼내오는 거 기다리느라."

"나머지 반은?"

"...... 소매치기가 보이길래."

"음. 그래서, 일단 그놈을 잡고 보니 당연히도 아이스크림은 어딘가로 사라졌고, 추가로 경찰이랑 시민들의 관심을 피하느라 다른 가게까지 좀 돌아서 갔다왔다?"

"넌 날 너무 잘 알아."

"새삼스럽게 뭘."

스티브는 투덜거리는 시늉을 하며 버키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네줬다. 버키는 득의만만한 미소를 띠며 아이스크림을 물고 다시 누웠다. 스티브는 해피를 위해 사온 아이스 팝을 잘게 부숴 물그릇에 담아준 후 자기도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었다.

"그래서 대체 무슨 얘기 했는데?"

"비밀이라니까."

"뭐야. 왜 난 안 알려줘."

"어때서? 너도 나 외박할 때 해피랑 밀담 실컷 했을 거 아냐. 그러니까 나도 비밀 유지할 거야."

"안 물어보려고 했는데 자꾸 숨기니까 더 궁금해지잖아."

"...흠. 좋아. 아이스크림 맛있으니까 특별히 알려줄게. 무슨 얘기 했냐면..."

"했냐면?"

버키는 진지한 표정으로 스티브에게 손짓했고 스티브는 기대에 눈을 빛내며 버키에게 귀를 기울였다. 버키는 손나팔을 만들어 스티브에게 속삭였다.

"...너보다 해피가 더 좋다고. 백배 천배 좋다고. 사랑한다고. 너밖에 없다고-"

"아이스크림 내놔."

스티브가 손을 뻗자 버키는 재빨리 남은 아이스크림을 입에 밀어 넣었다. 스티브는 다시 그 손목을 잡아 당겼고 버키는 끌려가지 않으려 버티며 다른 손으로 스티브를 밀어냈다. 잠시 엎치락뒤치락하던 둘의 공방은 스티브가 온 힘으로 밀어붙인 끝에 버키를 덮쳐 누르는 걸로 결판 났다.

"이건 무효야! 치사한 자식! 난 아까까지 해피랑 힘 빼고 있었어!"

"소매치기 잡고 온 나는 어떻고?"

"웃기네. 캡틴 아메리카가 그까짓 거 잡는데 얼마나 힘들었다고-"

갑자기 뭐에 막힌 것처럼 소리가 끊겼다. 새콤한 빙과를 깨물어 먹기에 여념이 없던 해피가 의아해 하며 돌아보니 둘의 머리가 겹쳐 있었다. 스티브의 손은 어느새 버키의 손을 단단히 깍지 낀 채였다.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있고 들리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동물의 감으로, 해피는 두 사람 사이에서 더 조용하지만 더 중요한 2차전이 시작되었음을 눈치챘다. 지금 자신의 역할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빙과나 마저 깨물어 먹는 것이라는 사실도.

그래서 해피는 그렇게 했다. 도로 물그릇으로 고개를 돌리고 이제 거의 다 녹은 빙과를 깨끗이 핥아 먹었다. 문득 아까 스티브가 나무 뒤에서 기척을 죽이고 있던 것이 생각났다. 왜 그는 애꿎은 아이스크림을 다 녹여버리고 다시 소리 죽여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다 와서는 거짓말을 했을까. 버키는 그의 거짓말을 눈치챘을까.

어쩌면 지금 둘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바로 그 비밀을 확인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해피는 꼬리를 한 번 휘젓고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공원은 충분히 넓고, 날씨는 딱 흡족하도록 좋았다. 평화로운 오후를 즐기며 산책 한 번 다녀올 시간은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