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에게 미안할 뿐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위협적인 일이었지만, 네이슨의 기억을 갖고 있는 것은 매우 유용할 때가 있었다. "피터가 감기에 걸렸을 때는 사과를 주구장창 먹이면 된다." 처럼 소소한 메모가 그러했다. 거기다 "생사과보다는 구운 사과나 사과파이가 더 효과가 좋다." 라는 주석에 이르면 평범한 빅브라더의 진가가 유감없이 드러났다.
세상에 단 한 사람만의 비밀이었던 이 사소하고도 귀한 지식에 접근했을 때 가브리엘은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었다. 피터가 감기로 고생한 지는 이미 나흘이나 되었던 것이다. 재생력을 잠깐 빌리면 간단할 것을 '가벼운 거니까 조금만 참으면 지나갈 거다' 라며 굳이굳이 앓는 모습이 참 그답게도 미련했고, 가브리엘은 그 모습을 그냥 보고만 있기가 싫었다. 그렇다고 전처럼 치유력을 억지로 쥐어줬다간 정색한 피터에게 제대로 혼날 게 뻔하고. 네이슨 식 처방이라면 가장 '인간적'이고도 인상적인 방법으로 피터를 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적어도 몇 시간, 그러니까 세 시간 이십팔 분 사십일초 전까지는.
"저런,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니까. 생각보다 훨씬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Mr. Gray? 그래가지고 어디 가서 능력 자랑하겠나?"
"내 능력은 이런 걸 이해하는 게 아니라고 했잖아, Damn it! 좀 닥쳐! 당신 때문에 더 정신사납다고 몇 번을 말해!"
손질하던 사과를 팽개치듯 내려놓으며 가브리엘은 네이슨을 쏘아보았다. 주입된 기억과 사념추적과 형태변환의 시너지에 힘입은 유령은 과장되게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고 가브리엘은 '이 짓'을 시작한 후 다섯 번째로 혈압 상승을 느꼈다. 세 시간 삼십분 이십이초 전의 자신은 대체 얼마나 순진했기에 아무 의심도 없이 저 작자를 믿었는지, 할 수만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서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다.
물론 그래봤자 들을 변명이라곤 아주 뻔했다 ; 가브리엘 그레이가 알고 있었던 네이슨 페트렐리라는 인간은 결코 지난 세시간 삼십이분 육초만큼 잔소리가 많지 않았던 것이다.
표정을 읽었는지 생각을 읽었는지 네이슨이 한 마디 했다. "확실하게 하고 싶다고 한 건 네 쪽이었는데. 그건 기억 안 나는 모양이지?"
"그 '확실하게'가 사과 고르고 다듬는 것까지 일일히 검사받는 걸 말한다면, No, I can't remember, definitely. 그리고 닥치라고 했어."
지난 세 시간 …분 …초의 노고를 떠올리자 절로 치가 떨렸다. 냉장 사과는 안된다며 굳이 상온 보관했던 것만 찾지를 않나, 그 중에서도 산지와 품종을 따지질 않나, 말 그대로 상처 하나 없는 것들만 골라내질 않나. 거기까진 그래도 괜찮았는데, 사과를 씻고 껍질을 벗기고 조각내고 소스를 만드는 등 본격적인 요리에 들어서자 숫제 시어머니처럼 까다롭게 구는 통에 평소 같으면 벌써 다 구웠을 이 시간 동안 사과파이는 여전히 '준비 중'에 머물러 있었다. 페트렐리가 아무리 별종이라지만 먹는 것에까지 이렇게 번거롭게 구는 것은 이상하다 못해 수상쩍은 일이라, 가브리엘은 네이슨이 자기를 골탕먹이려 한다는 의심을 이미 굳히고 있었다.
그러나 짜증과 위협에 돌아온 것은 가소로워하는 코웃음이었다. "오, 그래. 혼자서도 잘 하는 어린이라 이거지. 그럼 소원대로 이제부터 구경만 할 테니 어디 맘껏 실력 발휘 해봐. 페트렐리 특제 레시피를 Non-Petrelli가 얼마나 그럴듯하게 흉내낼지 기대되는걸."
"……."
"참고로 지금까진 하이디도 성공 못 했어. 하지만 '특별한' 이해력을 가진 우리 Mr. Gray라면, 뭐, 해낼지도 모르지. 한 백분의 일 쯤?"
"……."
"걱정 마. 그래도 피터는 일단 먹어줄 거야. 대놓고 투정부릴 만큼 몹쓸 녀석은 아니니까. 참, 애초에 이게 어떤 파이인지 그냥 입 다물면 되잖아? 네가 감기 걸렸을 때 늘 먹던 '특별한' 사과 파이가 아니라 어디 사는 누가 비슷하게 만들려다가 귀찮아서 때려치운 '평범한' 파이라고 하면, 흠. 그래. 나름 합리적일지도 몰라. 적당한 노력으로 적당한 감동. 가산점은 없지만 기본 점수나마 받겠지."
"……."
"정말 그걸로 만족하는 거라면, 나라고 굳이 네 녀석 가르치느라 번거로울 필요가 뭐 있겠어. 좋아. 이참에 다 때려치우자고. 팔자에도 없던 선생 노릇 따위 안 그래도 슬슬 피곤하던 참인데-"
네이슨이 정말 일어날 듯 식탁을 짚은 것과 가브리엘의 입에서 으르릉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온 것은 거의 동시였다. "지금 일어나면 진짜 죽을 줄 알아." 왕년의 연쇄살인마를 떠올리게 하는 낮은 목소리는 충분히 위협적으로 들릴만 했다. 그러나 최후 피살자의 유령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그거 참 유감이군. 세 번 죽을 목숨은 안 붙어있어서 말이지." 명백한 비꼼조에 목울림 소리는 빠드득하는 이빨 가는 소리로 바뀌었고 네이슨은 다시 한 번 코웃음 친 후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래서, 선택은?"
당장이라도 물어뜯겠다는 듯이 네이슨을 노려보던 가브리엘이었으나 결국 애꿎은 입술만 깨물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손이 아까 팽개친 사과를 도로 집어드는 것을 보자 네이슨의 미소는 더 진해졌다. "Good boy." 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득의만만함에 가브리엘은 다시 한 번 이를 갈았다.
"Go to hell, you fucking Petrelli."
"I'm doing my best. 아, 거기 껍질 덜 깎았네."
"젠장!"
이 와중에도 머릿속 시계는 쓸데없을 정도로 착실했다. '세 시간 …분 …초, 대 빅브라더 다섯번째 패배' 따위가 자동집계되는 순간 가브리엘은 앞으로 얼마나 더 이 기록을 갱신해야 할지 진심으로 암담해했다.
소재=사과, 인물=네이슨게브로 키워드 연성 for 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