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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방

<검은방> 하무열, 허강민

by 천수 2012. 3. 27.

  가장 최근에 파고 있는 페어^^ 인데 왜 자캐들도 다 미뤄놓고 먼저 쓰냐면 이미 내 일부가 되어있는 자캐들이나 자캐나 다름없이 된 절망희팸과는 달리 이쪽은 아직 완전히 체화가 안 되었기 때문. 그리고 왠지 모를 예감으로, 시간이 지나도 '나에게 이 커플은 이러하다' 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확고한 상이 성립이 안 될 것 같기 때문.

 

  어쩌면 앞서의 예들과는 달리 검은방 시리즈는 아직 다 섭렵하지 못해서일지도 모른다. 하무열도, 허강민도, 아직 내게는 막연한 이미지로 어른거릴 뿐. 내가 '파고 있다' 라고 얘기하는 그 어떤 캐릭터 또는 커플과 비교해도 이들처럼 언어로 정리되지 않는 이들이 없다. 모호한 색깔, 형체, 눈빛과 표정. 그런 것들이 한순간 떠올랐다가 흐릿한 잔상을 남기고 가라앉아버린다. 심지어 그들 사이에 필연적으로 끼어있을 수 밖에 없는 류태현은 아예 그 속이 감이 안 잡힌다. ……그렇다. 난 아직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흔히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얘기를 하는데, 지금 이들에 대해 내가 느끼는 기분은 정확히 그 반대다. 가슴으로는 아주 강렬하게 무언가가 느껴지는데, 조금만 더 고민해보면 '아 이거였구나' 하고 납득이 될 것도 같은데, 근데 머리로는 그게 풀리지가 않는다. 근접발달영역이다. 조금만 더 키워드가 모이면 늘 그래왔듯이 내 나름의 도식, 그러니까 패턴이 그려질 것 같은데, 아직 그게 부족하다. 단서가 부족하다. 하무열도 허강민도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분명히 클리셰가 존재하는 캐릭터지만 또 그 익숙한 클리셰로만은 파악되지 않는 독특한 캐릭터들이라. ...아, 망했다. 커플을 파려면 적어도 둘 중 하나는 80%는 이해하고 있어야 관계도가 그려지는데 이 둘은 둘 다 아직 반도 못 된다. 스스로 충분하다고 느낄 정도로 원작 이해가 되지 않으면, 하다 못해 야매라도 내 나름의 고찰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아무리 좋아하고 파고 싶어도 찝찝해서 건드릴 수가 없다! 왜냐면 나는 그릇 밖으로 물 넘치는 게 싫거든!!

  그래서 더 열렬히 다른 사람들의 팬워크를 탐색한다. 지금으로서는 허강민 위주로. <Liberty>와 <괴물의 탄생>이 가장 기본(standard). <매화, 바람>과 <두 사람>이 이상(ideal, most desirable). <Komm, Susser Tod>는 매우 구체적이고 확고하지만 난해하다(really specific but complex). 그리고 나의 이해는 그 중간 어디쯤에 있다. <악연>이나 <겨울 가을 여름 그리고 봄>과 비슷……할까.

  가끔은 내 안에서 비슷한 유형으로 묶이는 다른 캐릭터들을 비교해보기도 한다. 한세건이나 버몬트. 세세한 면에서 차이는 있지만 창월야에서 김성희가 한세건을 평가한 얘기가 허강민에게도 아주 잘 들어맞는 것 같아서. 

 

 

  여기에 주지화(intellectualization), 이인증, 분열성PD 약간에 정신분열증(편집형) 증상 일부를 추가하면 내 머릿속에 있는 허강민이 어떤 모습인지 대략 알 수 있다. (스스로 기억/이해하기 편하려고 정신병리학 용어를 쓰고 있기는 한데 분명히 말해서 난 허강민을 정신병자로 모는 것이 아니다. 이 인간한테 필요한 건 임상치료가 아니라 인간적인 수준에서 진솔한 대화다. 장혜진이 했던 것처럼.)

 

  좀 더 정리가 되면 더 쓰고 강민이는 구우럼 20000.




  근데 허강민은 다른 사람들이 분석해놓은 것도 많은데 하저씨는 당췌……. 3편이라는 오피셜로 충분히 이해 가능한 건가. 아니면 다들 비슷비슷해서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허강민보다 적은 범주로 묶여버린 건가. 아직 강민이만큼 찾아보지 않아서 안 보이는 건지도 모르지만……

 

  여기서 잠시 레귤러즈의 이미지를 평해보자면,

 

  - 류태현은 공기나 안개 ; 흐릿하고, 부드럽고, 포근하고, 약하고, 훅 하고 불면 흩어져버리는. 가득 차 있지만 쉴 새 없이 흔들리는. 미완성의 패트로누스?

  - 강민이는 악몽 ; 강렬하지만 허무한. 압도적이지만 실체가 없는. 눈 앞에 온통 새까만 형체가 있다 ─ 속에 뭐가 있는지, 접촉하면 어떻게 될 지 몰라 무섭다 ─ 눈 딱 감고 손을 내밀어 휘저어보니 그저 깊고 텅 빈 구멍이었다 라는 느낌.

 

  그리고 하저씨는 색과 선이 너무 뚜렷해서 오히려 알아보기 힘든, 좀 해상도가 이상한 디스플레이를 보는 느낌.

 

  일단 보기보다 굉장히, 많이, 비겁하고 치사한 사람이라는 건 알았다. 그리고 매우 매우 목적지향적이다. 치밀하기도 하고. 거기다 빌어먹을 정도로 유능하다. 이건 분명히 사실이다. 이 인간의 두뇌는 검은방 내 모든 캐릭터 중에서 단연 뛰어나다. 욕 나올 정도로 똑똑한/교활한/영리한/냉정한/명석한…… 하여간 머리 좋다고 할 때 쓰는 모든 말을 다 갖다붙일 수 있을 것 같다. 좋은 의미도 나쁜 의미도.

  그리고 모든 캐릭터 중에서 가장, 이중적이다. 현실과 이상, 선과 악, 선 안과 선 밖 등등. 작중에서 허강민과 류태현으로 대립되고 있는 요소들을 다 가지고 있다. 즉, 류태현과도 허강민과도 닮은꼴이다. 저울의 양쪽에 허강민과 류태현이 있다면 하저씨는 가운데에서 지렛대를 지탱하는 무게중심. 저울이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질 때 조금씩 움직이면서 균형을 맞추는 존재. 그러나 반대로, 양수연 때와 같이, 스스로 움직여서 균형을 무너뜨릴 수도 있는 존재. 결국 어떤 식으로든 그들의 '게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  그래서 태현은 '하무열'을 누구보다도 동경, 신뢰, 의지하는 동시에 은연중에 두려움과 거부감을 느낀다. 역으로 강민에게 '하무열'은 마땅히 배제해야하면서도 그 놈의 선을 넘었다는 동질감 때문에 관심을 끊을 수 없는 인간이다. 태현과 강민 사이에서 하무열을 놓고 밀고 당기기가 없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 본편 중에는 한결같이 태현이를 지탱해주지만 그게나야 엔딩이나 특전에서는 강민이 옆에 붙어버리는 공인된 이중성의 소유자. 정작 '하무열' 본인은 그 사이에서 약 팔고 독 팔고 있지만. 

  그래, 결정적으로 이 아저씨는 이기적이다. 류태현이 희생적 이기주의자(혹은, 이타적 이기주의자)라면 이 아저씨는 대놓고 이기주의자다. 4에 이르러서 류태현은 허강민의 '대항마'였던 자신을 포기했지만, 하저씨는 끝에 끝까지 ─ 내가 보기에는 ─ 자기가 손에 쥐고 있던 것들을 아무것도 내려놓지 않았다. 피는 좀 흘렸지만, 결국 그는 자기의 무게 중심을 유지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세 사람 사이에서 심적으로 가장 강인한 사람이 되는 것도 하무열─ 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현실적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그리고 그 강인함이. 곧 죽어도 자기를 포기하지 않는 그 질긴 고집이. 끈기나 인내심을 넘어선 악(惡)이. 이 아저씨가 시리즈 전체에서 정신적 지주가 되고, 내 안에서 허강민을 구해줄 손이 된 이유.

 


 

  캐릭터 분석하다 보니까 얘기가 좀 많이 나간 것 같은데, 최종적으로 포인트는 이거다. 허강민은 비틀렸고, 하저씨는 삐뚤어졌다. 둘 중에서 바로잡기가 더 쉬운 건 삐뚤어진 쪽이다. 하다 못해 자기가 마음 추스르기만 해도 가능하니까. 그러니까 좀 더 어른이고 또 좀 더 정을 아는 하저씨가 아직 미숙하고 인간관계에 서투른 강민이를 인내심을 가지고 받아주고 끌어주면 좋겠다는 거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하저씨도 좀 양보를 해야 한다. 강민이도 하저씨도 자기 방어가 강해서 계속 부딪치기만 하고 제대로 서로를 보지 못했다. 이럴 땐 별 수 없다, 어른이 양보 해야지. 그리고 하저씨가 더 자산이 많이 남아있잖아. 강민이는 이제 정말 가진 것도 잃을 것도 없어. 그러니 영역 다툼은 이제 그만하고 끝자락이라도 내어주면서, 먼저 앉으라고 손 내밀어주란 말이야. 유기견 하나 거둔다 생각하고. 

  감정이 없다느니 둔하다느니 모른다느니 하지만 사실 이 자식은 의외로 촉이 좋아. 이 사람이 가식을 떨고 있구나 아니면 진심으로 말하고 있구나 하는 것은 예민하게 알아차린다고. 그리고 진심으로 밀고 들어오는 사람한테는 또 의외로 약해. 거짓과 적의에는 비난과 냉소로, 공격에는 더한 공격으로, 두려움에는 무시로, 그런 방어형 대응방식은 아주 빌어먹을 정도로 잘 익혀놓았지만, 침범이 아니라 스며들어오는 온기에는, 진짜 온전히 주어지는 사람의 정에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아직 모르거든. 내가, 이 녀석을 바라보듯, 모호하고 막연하게 감각할 뿐이지. 그러니까 가르쳐줘야 하는 거야. 비틀리지 않은 감정을 비틀리지 않은 방식으로 나누는 법을. 머리로 판단하고 재단하기 전에 심장으로 받아들이는 법을. 

  그런데 그런 걸 알려주려면 녀석보다 분명히 강한 사람이어야만 해. 지금 강민이 앞에 강민이와 엇비슷하거나 더 약한 사람을 데려다놓으면, 이를 테면 태현이나 안승범 같은 녀석이라면, 아직은 강민이를 감당할 수 없으니까. 결국 그 녀석을 두려워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이 지금으로서는 아저씨 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아저씨는, 아닌 척 해도, 그런 방법들을 다 알고 있으니까. 아닌 척 해도, 하면서도, 사실은 가장 현실적인 방법으로 남들의 등을 지켜주고 있는 사람이 아저씨니까.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는데 뭐 하러 이렇게 주절거렸는지 모르겠다. 그래, '형사' 하무열이 아니라 '인간' 하무열로서, '괴물' 허강민이 아니라 '인간' 허강민을 끌어내달란 말이야. 인간 대 인간,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해, 당신들은. 이기려고 하는 게 아니라 일단 나란히 앉아서 서로 편견을 버리고 들어보는 걸로. <매화, 바람>이 그 부분에선 정말 제대로지. 왜, 왜 그걸 못 해가지고. 나를 슬프게 하니.

 

 


  ……그나저나 분명 시작은 커플 썰을 풀어보려고 했던 건데 쓰고 보니 캐릭터 분석이 주고 끝에 와서야 커플썰이 나왔네. 여기다가 계속 쓰면 너무 길겠지? 아이고 모르겠다. 어차피 이쪽에 쓰는 글은 주저리주저리가 모토니까 일단 이 글은 여기까지 하고. 나중에 보완할 거 생기면 보완하고. 커플 썰은 따로 써야지. 구우럼 2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