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히어로즈/OH

Only Human 1

by 천수 2013. 9. 18.



현란하게 번쩍거리는 클럽 안. 음악소리가 밖까지 새어나갈 듯 어지러운 가운데 사람들이 부대끼며 춤을 추고 있다. 술과 음식과 남자와 여자라는 유흥과 향락이 휘몰아치는 곳. 어디에나 있을 법한 적당히 규모 있고 인기 좋은 그런 클럽이다.

시끄럽고, 번잡한 그 한 구석에서부터 웅성거림이 퍼진다. 입구쪽에서부터 시작된 작은 소란이 점점 클럽의 안쪽으로 파고들어오더니, 곧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모습을 드러낸다 ; 긴 검은 코트를 걸친 작은 남자. 바짝 세운 칼라 위 하얀 얼굴은 어느 집 도련님인 듯 귀티가 나지만 잔뜩 찌푸린 눈썹 아래 강렬한 눈빛과 삐딱한 입매는 온갖 말썽이란 말썽은 다 겪어본 반항아의 그것이다. 

뭐가 그리 불만인지 노려보다시피 하는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놀람 또는 호기심으로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를 계속 헤치며 홀 가장자리를 빙 두른 룸 쪽으로 향한다. 문을 대신하는 커튼들을 죽 훑어보던 시선이 한 곳에 꽂히고, 그 순간 꾹 다물려 있던 입술이 뒤틀린다. 고함치기 직전의 표정으로 그는 성큼성큼 그쪽으로 다가가 사람들이 놀랄 만큼 거칠게 커튼을 촤악 열어젖힌다. 

그쯤에서 이 불청객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이 젊은이가 여자친구의 바람피는 현장이라도 잡으러 왔으려니 막연하게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커튼 안쪽에 있는 것은 그들의 기대를 배반한다 ; 룸은 비어 있다. 비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 그림자도 안 보이고 아주 조용하다. 그러나 남자는 오히려 더욱 분기탱천한 듯 안쪽으로 뛰쳐들어간다. 테이블을 확 밀어내며 소파 앞에 선 그는 그제야 꾹꾹 눌렀던 화를 터뜨린다. 

"You son of bitch! 또 이 따위 숨바꼭질을 시키다니! 당장 안 일어나면 성수를 부어주겠어!!"

목청이 어찌나 큰지 '성수'라는 소리를 듣고 주변 사람들이 다 쳐다본다. 클럽에서 웬 성수 타령? 그리고 정말로 어떤 목소리가 그 점을 지적한다.

"피터. 몇 번이나 말하지만 난 악마가 아니야. 성수를 뿌린다고 비명을 지르며 녹아내리진 않는다고." 

졸음기가 남아있는 약간 잠긴 목소리. 그리고 테이블에 가려있던 안쪽 소파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앉는 걸 보니 훤칠하게 키가 큰 남자인데 아무리 사각을 이용했다지만 어떻게 거기 숨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쳐들어온 남자, 피터가 활활 타는 눈으로 쏘아보는 가운데 그는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넘기고서 슬쩍 피터를 올려다본다. "뭐, 그래도 옷이 젖는 건 싫으니까." 선이 진한 얼굴이 한쪽 눈썹을 올리며 얄밉게 웃는다. 흑갈색 눈동자에 클럽의 조명인 듯 선명한 빛이 스치고는 다시 어두워진다. 

"그래서, 무슨 일이길래 여기까지 찾아온 거지?"




깊은 밤이다. 아마 자정을 넘긴 듯한. 상점들도 문을 닫고 가로등만 드문드문 켜져 있는 어두운 거리를 두 사람이 걷고 있다. 한 사람은 키가 작고 한 사람은 키가 크다. 맞춘 듯이 새카만 옷을 걸쳤지만 작은 쪽의 그림자는 긴 코트 자락이 흔들리고 큰 쪽은 몸에 딱 맞게 떨어진다.

작은 쪽이 투덜거린다. "그러니까 대체 왜 매번 그런 데 처박혀있느냔 말이야." 

큰 쪽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한다. "글쎄 거기가 잠이 잘 온다니까." 

작은 쪽이 코웃음을 친다. "뭐, 음악소리가 온 벽을 울리고 취객들이 소리질러대는 그런 클럽에서 맨정신으로 숙면을 취하신다고? 그보다는 날 화나게 하는 게 재밌는 거지. 안 그래?"

큰 쪽이 이번에는 고개를 까딱해보인다. "그렇게 싫으면 그냥 내버려두면 되잖아. 너야말로 그렇게 싫어하면서 왜 매번 '그런 데'까지 굳이 찾으러 오는 거야?" 

작은 쪽이 큰 쪽을 힐끗 올려다보았다가 고개를 흔든다. "요지는 '그런 데'가 아니야. '매번'이지. 꼭 필요할 때 숨어있다가 쫓아가서 다그쳐야만 어슬렁거리며 나오는 그 몹쓸 버릇 말이야. 필요하지 않으면 내가 널 굳이 왜 찾겠어." 

큰 쪽이 잠시 멈칫한다. 그러나 아주 잠깐. 작은 쪽이 알아차리기 전에 그는 다시 걸음을 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