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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즈

피터↔가브리엘, 체감시간의 차이 (20130706)

by 천수 2013. 12. 8.

20130706



  꿈 속에 갇힌 5년 중에서 혼자 지낸 3년은 후회와 고독과 자책과 체념과 절망이라는 이름으로 '사일러'를 죽이는 시간이었겠지. 사일러를 묻어버리고 가브리엘만이 우울하게 고독을 곱씹고 있는 그때 피터가 나타났을 거고.

  피터와 함께 지낸 2년은 고독으로부터의 구원과 사죄를 통해 이기적인 살인마 사일러를 완전히 버리고 더 성숙한 인간 가브리엘로 거듭나게 했을 거야.

  그래서 2년 사이에 심적으로 피터에게 기대고 용서받고 싶어하는 가브리엘과 그를 여전히 증오하면서도 점점 동정과 이해를 키워가는 피터 까지는 오피셜이란 게 함정이고. 둘 사이에 싹트는 감정의 변화를 보고 싶다.

  피터가 갑자기 없어지고 또 혼자 남을가봐 졸졸 따라다니고 막 눈치보면서 어떻게 하면 내가 변했다는 걸 믿어줄래? 어떻게 하면 날 용서해줄래? 하는 가브리엘은 평범한 대형견이겠지.

  그리고 졸지에 주인이 된 피터는 속이 터져 미치겠지. 빨리 나가야하는데 저 멍청이는 계속 우울우울하며 시간 먹고 존나 미워 죽겠는데 들러붙고 근데 또 보고 있으면 불쌍하고 그렇게 양가감정 폭발하고. 


  그래서 어느 날 울화 폭발 반쯤 제정신 아닌 상태에서 심한 짓을 하고.

  처음엔 식겁하던 가브리엘도 나중엔 그래 내가 죄가 있으니까 하며 자포자기하고.


  정신을 차리면 피터는 그래도 본래 선량한 성격이라 스스로 충격 받아서 아무리 그래도 내가 너무 심했어 하고 양심상 괴로워하는데 완전히 삶에 희망을 잃은 가브리엘은 상관 없다며 어차피 여긴 너와 나 뿐이니 네가 그렇게 내가 밉다면 좋을 대로 하라느니.

  그 말에 피터는 또 빡치는데 이번엔 쟤랑 나 둘을 향한 분노.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놈이지만 저렇게 죽은 채로 사는 것 같은 모습은 그 착한 마음씨로는 보기가 괴로운 거지. 그런데 동정하면 용서하는 것 같고 또 그런데 아직 용서는 못하겠고.

  차라리 계속 미워할 수 있게 네가 계속 나쁜놈이면 좋겠다 싶은 나머지 욱해서 오냐 네가 어디까지 버티나 보자 계속 난폭하게 굴고. 피터가 그럴수록 가브리엘은 이젠 정말 글렀나보다고 체념해서 그래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네가 날 죽여라 하고 끌려다니고.


  그렇게 악순환이 거듭되는데 어느 날 피터가 제풀에 못 참고 울음을 터뜨릴 것 같다. 넌 대체 왜 그렇게 나를 괴롭히냐고. 내 사랑하는 형을 그렇게 앗아가놓고 이젠 널 미워하지도 못하게 그렇게 비참하게 구냐고. 차라리 계속 나쁜놈으로 있지 그랬냐고. 그렇게 펑펑.

  그리고 피터가 그렇게 속상해서 울면 가브리엘은 완전 멍때릴 것 같다. 자긴 자기대로 미안해서 그랬던 건데 자기의 죄책감마저 피터에게 또 상처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테니. 결국 이번에도 할 수 있는 말은 아무 것도 돌이킬 수 없는 "미안해" 뿐이고.


  그러나 서로 양극으로 치달았음을 확인한 그때부터 둘의 관계가 조금씩 풀리면 좋겠다. 피터는 지금의 가브리엘을 계속 미워하는 게 자기한테 너무 힘들다는 걸 인정하고. 가브리엘도 피터가 자기를 받아들이기 어려울 거라는 걸 이해하고.

  그리고 가브리엘이 일어서기로 마음먹는 거지. 피터를 위해서 여기서 나가야겠다고, 그래야 그가 날 믿어줄 거라고. 피터도 어차피 가브리엘이 현실을 마주할 의지가 없다면 나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 그의 좀먹은 자아를 추슬러주려 노력하겠지.


  그렇게, 물론 순탄치는 않지만, 서로 포기하지 않게 지탱해주던 어느 날, 이번에는 가브리엘이 먼저 피터에게 다가가면 좋겠다. 피터는 운 날 이후로 더 이상 가브리엘에게 손대지 않는데 가브리엘이 자기는 괜찮다고. 물론 폭력이 좋은 건 아니지만 피터가 쌓인 감정을 풀 필요가 있으니까 각오하는 것. 그러면 피터가 정말 괜찮냐고 물어볼 거고. 가브리엘은 선택권은 네게 있다고 대답하는 거지.

  그러면 좀 망설이던 피터가 가브리엘에게 손을 뻗고. 가브리엘은 주먹을 예상하며 눈을 질끈 감지만, 피터는 전과는 달리 마치 가브리엘이 거기 있다는 걸 처음 안 것처럼 가만히 끌어당겨서 오래 오래 부둥켜안고 있으면 좋겠다. 뜻하지 않은 상대에게서 뜻밖의 접촉방식에 가브리엘은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어쩐지 마음이 풀어지고. 피터도 자기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지만 같이 마음이 풀어지고.

  미워할 사람도 사랑할 사람도 서로밖에 없는 그 세계에서 서로 끌어안기를 택하는, 두 사람 사이에 처음으로 따스한 만남을 보고 싶다.




  썰계에서. >The Wall에 대해서 처음으로 풀어본 썰이지만 이때 나는 겨우 시즌1을 보고 있었다는 게 함정!! 볼륨5까지 다 보고 나서는 피터도 가브리엘도 이미지가 많이 달라졌지. 

  그래도 둘 사이에 화해까지는 못해도 이해가 생겨나려면 일단 둘 다 한번씩은 무너져봐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 없음. 자기의 경계를 손보아야만 타인을 들일 수 있는 법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