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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즈/ANH

A New Hope 3

by 천수 2013. 12. 3.

3. Daydream


- 몇십 년을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가브리엘은 일종의 재활훈련을 거침. 재생능력 덕분에 신체적 능력은 금방 회복하는데 다른 '능력'들이 얼마나 남아있는가가 문제 ; 테스트 결과 '사일러' 시절만큼 다룰 수 있는 것들은 선천적 능력인 직관과 가장 활용이 잦았던 재생, 염력, 전격, 연금술, 비행으로 진단. 다만 The Wall과 Sleepwalking의 여파로 특기였던 시간감각은 아직 뒤엉켜있음. 그 밖에 거짓말 탐지와 내력 감지는 반응이 없었고 외형 변환은 가브리엘이 거부. 나중에 밝힐 거지만 비활성상태로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 퇴화해버린 다른 능력들과 달리 이 세 가지는 심리적으로 억압된 상태.

- 클레어는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며 가브리엘에게 컴퍼니의 특별 고문직을 제안. 물론 능력을 연구하는 인원은 이미 충분하지만 '현장 경험이 풍부하고', '즉각적인 대응이 가능한' 보다 '특별한' 인재가 필요하다는 이유. 가브리엘은 내가 누군지 알면서 그런 제안을 하느냐고 되묻고 클레어는 아니까 하는 말이라고 대꾸함.

- 결국 보호 겸 감시 차원에서 컴퍼니에 소속된 가브리엘. 클레어는 큰 문제 안 일으키면 적절한 시기에 퇴직 처리하고 여생을 보장해주겠다고 약속. 그게 가능할까 의심하던 가브리엘은 첫 출근날, '사일러'에 대한 공고가 돌았음에도 흘끗거릴 뿐인 직원들을 보고 세월의 격차를 다시 한 번 실감함 ; 세상은 이미 그를 잊었음. '무덤에서 돌아온 50년 전의 연쇄살인마'보다 '50년간 컴퍼니를 진두지휘해온 국장'의 전설을 더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보며 가브리엘은 벤을 보았을 때와 비슷한 양가감정을 느낌.


- 물론 그렇다고 해서 견제가 없지는 않음 ; 컴퍼니에서 주어진 권한은 최소한이며 직원 및 요원들은 가급적 그에게 접근하지 않음. 위치추적용 발신기를 심어놓은 것은 물론 어쩌다 일이 있어서 나갈 때에도 반드시 둘 이상의 감시가 붙고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현장에 내보내지도 않음. 이따금 가브리엘은 그의 악명을 두려워하거나 적대시하는 징벌주의자들을 마주치기도 함. 아주 잠시 함께 일했을 때 노아가 그랬듯이.

- 그런가 하면 루크가 그랬듯이 주체 못할 호기심으로 은근히 그에게 접근하는 이들도 적지 않음. 클레어가 무서운 건지 남들의 시선이 무서운 건지 내놓고 다가오지는 않지만 가브리엘은 매일같이 사원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개중에는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이미지로 그를 동정하기로 마음먹은 성급한 온정주의자들도 있음.

- 또는 당코나 아서가 그랬듯이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그를 이용하려 하는 이들도.


- 남들이 어떻든 가브리엘은, '능력'을 알기 전의 시계수리공이 그랬듯이 필요한 일 외에는 일절 손대지도 관심을 가지지도 않음. 피터를 잃은 이후 그에게 세상은 다시 톱니로 돌아가는 크고 차가운 시계가 되어버렸음. 지금 그가 살아있는 이유는 첫째는 죽을 수가 없어서이고 둘째는 죽으면 피터를 기억할 수 없어서임. 이제 그에게는 아무 목표도 희망도 없음. 이 세상에 그가 의미를 부여할 것이 아직 남아있다면 그것은 피터가 남긴 사람들뿐임 ; 클레어와 벤.


- 클레어에게는 '피터를 잃었다' 라는 점에서 조금은 동질감을 느낌 ; 그녀가 피터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기억'하는 가브리엘은 '삼촌이 그리워서' 자신을 끌어올렸다는 말에서 그녀가 숨기고 있는 외로움을 어렴풋이 '느끼고', 그게 앞으로 자신의 것이 되리라는 것도 '이해'함. 가끔은 그녀의 외로움이 자신보다 더 클지도 모르겠다고 '짐작'함 ; 자신에게는 사랑했던 것=잃어버린 것=그리워할 것이 피터 밖에 없으나 클레어는 많은 사람들과 애착을 형성했고 그만큼 많은 상실 경험을 해야만 했으므로. 애초에 혼자였던 자신과 달리 남과 기대어 살다가 홀로 되어버린 그녀가 느끼는 낙차가 더 클지도 모른다- 라고. 어렴풋이.

- 클레어도 그렇게 느끼는지 종종 호텔도 아닌 모텔로 가브리엘을 불러내서는 별 얘기도 없이 줄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들이부음. '불사=늘어만 가는 빈자리'와 '피터=그리운 추억'이 그들이 공유하는, 그리고 서로의 존재를 용인하게끔 하는 희소한 접점. 남들의 눈을 피해 숨은 그 작은 방에서 그들은 처음에는 '그 한 사람'에 대해, 나중에는 '그때 그 사람들'에 대해 마치 추모하듯이 회고를 나눔. 이제는 서로만이 이해할 수 있는 시절이라는 사실에 씁쓸한 공감대를 형성하며. 마치 50년의 시간이 그들 버젼의 The Wall을 마련해준 것처럼.

- 허나 피터와는 달리 클레어는 아직 그에 대한 미움을 놓지 않은 상태이고 그래서 그의 상처를 후벼파는 일도 거리낌없이 함.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가브리엘은 클레어가 여전히 자신을 미워한다는 그 사실을 위안으로 삼음 ; 밖에서는 스스로를 걸어다니는 시체로 여기는 그들이지만 단 둘이 마주할 때면 서로의 눈에 들어있는 애증으로써 생의 감각을 되찾는 것.


- 반면 그렇게 죽지 못해 살고 있는 가브리엘을 벤은 순수하게 안타까워함. 그래서 시간만 나면 가브리엘을 찾아와서 이런 저런 새로운 사실들을 일러주고 외출도 같이 하고 밥도 같이 먹는 등 '시차 극복'을 도와줌. 비록 가브리엘이 사랑했던 할아버지는 이제 없지만 할아버지가 사랑했던 가브리엘은 새 삶에서 안정을 얻길 바라며 늘 마음을 씀.

- 재활훈련 중, 가브리엘이 그럭저럭 안정되었다고 판단되었을 때. 벤은 클레어와 상의해서 가브리엘을 피터가 살던 집으로 데려감. 엠마를 먼저 보내고 손자와 함께 살던 집은 이제 혼자 남은 손자가 물려받았음. 벤은 그 집에서 할아버지가 아끼던 '고장난' 시계를 가브리엘에게 보여줌. 언젠가 '친구'가 찾아오면 고쳐줄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지만 그날 가브리엘은 시계를 고치지 못하고 그냥 둠.

- 그리고 피터의 무덤 앞에서 결국 무너짐. 쓰러져 오열하는 가브리엘을 보며 벤은 그가 '피터 페트렐리'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실감하는 동시에 할아버지가 누군가에게 인생을 좌우하는 '빛'이었다는 사실에 묘한 기분을 느낌. 자신이 모르는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알고 싶다는 것도 벤이 가브리엘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 중 하나.

- 허나 가브리엘은 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함 ; 아예 뿌리칠 마음은 없지만 벤이 말하는 것처럼 '친구'가 될 마음도 없음. 그는 본래 이 시대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고, 자신의 시대에도 환영받는 존재는 아니었음. 피터의 죽음으로 제 업보가 자신이 아끼는 사람까지 위협하는 것을 톡톡히 느꼈기 때문에, 가브리엘은 차라리 벤을 멀리함으로써 = 안전하게 둠으로써 피터에게 속죄하려 함. 벤의 이해와 배려가 피터를 떠올리게 하면 할수록 가브리엘은 그가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믿음이 굳어짐. 그러나 네이슨이 클레어를 보호했듯이 자신이 그를 지키게 되리라는 것 또한 명백함.

- 그렇게 벤과 클레어를 포함한 가지각색의 사람들 사이에서 - 그들이 바라보는 방향 사이에서 가브리엘은 시계 태엽처럼 제자리만 돌고 있음.


- 어느 날 가브리엘은 BNW 기념일이라는 것을 알게 됨. 미국에서 법안이 발표되고 세계가 능력자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수용하게 된 날이라고 함. 크리스마스나 노예해방일 마냥 온 거리가 들뜨지만 가브리엘은 여전히 무심함. 한때는 그런 날을 기대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 그러다 공식 행사 일정이 있다며 나가는 클레어와 TV 화면에 떠오르는 클레어를 보는 순간 문득 위화감을 느끼지만 정체를 알지 못함.

- 그렇게 '기념일'이 지나가고 며칠 뒤 늦은 밤. 가브리엘은 클레어의 비서로부터 급하게 자신을 찾는 전화를 받음. 클레어가 무엇 때문에 기분이 나빴는지 술을 들이붓고 있는데 말리던 요원들까지 다 거꾸러뜨리고는 혼자서 여태 마시고 있다고, 저대로 거덜낼 기세니 와서 말려달라는 얘기. 어처구니가 없어 왜 그걸 나한테 부탁하냐고 물으니 그나마 당신이 국장님을 알지 않냐며 끊어버림. 더욱 어처구니가 없지만 아무튼 심상찮아보이니 가브리엘은 찾아감. 그리고 나뒹구는 술병들 가운데 홀로 앉아 멕시코 독주를 물처럼 들이붓는 클레어를 보고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음.

- 안되겠다 싶어 앞에 앉아 이게 무슨 짓이냐고 묻는 가브리엘에게 클레어는 아무 말 없이 잔 하나를 내밈. 가브리엘은 무시하고 클레어를 일으키려고 하지만 클레어는 요지부동임. 염력으로 끌고 갈까 하는 마음이 울컥 솟아나는 순간 클레어가 툭 내뱉음. 

"오늘이야." 

"뭐가?" 

"내가 뛰어내린 날." 

  가브리엘은 잠시 말이 없다가 제 앞에 놓인 잔을 듬. 클레어는 넘치기 직전으로 담아주고 둘이 나란히 마시기 시작. 클레어가 뛰어내린 날은 피터가 The Wall에서 가브리엘을 꺼내준 날이기도 함 ; 그들 모두가 새로운 삶과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날이지만, 지금에 와서는 좌절된 희망을 애도하는 날일 뿐. 패배감으로 자신과 상대방과 이 세상을 비웃으며 둘은 술잔을 주고받음.

- 결국 비서의 전화를 받고 자다가 뛰쳐나온 벤이 도착해서야 그 진득하게 우울한 술자리는 끝이 남. 취하지도 못하면서 취한 것처럼 킬킬거리던 둘은 벤을 보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낯빛을 싹 바꾸며 가라앉음.

- 그날 밤 벤에게 이끌려 집으로 돌아온 가브리엘은 추억에 취해 꿈에서 피터를 만나고,

- 다음 날 아침 가브리엘을 깨우려던 벤은 아직 꿈에서 다 못 깬 가브리엘에게 피터로 착각당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