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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바림

100428 벚꽃위에내린눈

by 천수 2012. 9. 2.

  벚꽃 지는 모습을 두고 흔히 눈이 내리는 것 같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그 말이 현실이 되리라고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4월이었다. 이제 막 꽃을 피워낸 벚나무 위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꽃잎처럼 하늘거리며, 그러나 갓 핀 꽃잎을 가혹하게 떨어뜨리는 따스한 차가움으로. 그리하여 누구나 한 번쯤은 입에 담았을 환상이 현실이 되었다. 분분히 날리는 것이 눈송이인지 꽃잎인지 구분할 수 없는 그것은 분명 진경(珍景)이었다. 진한 인디고 빛으로 물든

  그녀는 그 모순된 아름다움 속을 걷고 있었다. 엷게 쌓인 눈과 흩뿌려진 꽃잎이 그녀의 발밑에서 한 몸으로 이겨졌다. 사박, 사박, 사박, 사박. 늦추지도 빨리 하지도 않는 일정한 걸음걸이로 그녀는 계속해서 여린 봄과 지치지 않는 겨울의 사이를 걸었다.

  이윽고 그녀가 도달한 곳에는 커다란 늙은 벚나무가 고요히 서 있었다. 조금 따스해진 햇살에 속아 그 역시도 하얀 꽃잎을 가득 이고 있었다. 벚꽃이라 하면 흔히 연분홍빛을 떠올리지만 그 나무에 핀 꽃은 유독 희었다. 내려 쌓이는 얇디 얇은 눈꽃송이가 진실로 꽃잎의 하나로 보일 만큼, 그 고목의 한 가지 가지마다 매달린 것이 전부 눈의 꽃으로 보일 만큼.

  그러나 그 하얀 화편(華片) 역시 차가운 자매에게 자리를 빼앗겨 속절없이 때이른 낙(落)을 맞이하고 있었다.

  눈송이와 함께, 하이얀 꽃잎이 내린다.

  내려서, 그의 어깨 위에 가만히 올라앉았다.

  그녀는 묵묵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얼마나 오래 거기 앉아있었는지 머리, 어깨, 무릎 할 것 없이 눈과 꽃이 점점이 내려앉아있었다. 지금 이 순간도 계속해서 쌓이고 있는 그 여린 손길들, 자디 작은 무게들을 그는 심지어 털어내지도 않았다. 그녀가 앞에 섰을 때에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 고개를 떨군 채 움직이지 아니할 뿐. 그러나 그녀도 굳이 그에게 고개를 들어 나를 보라 말하지 않았다. 내리는 눈과 같은 시선으로 그를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시선은 어긋난 채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이윽고 먼저 움직인 것은 또 다시 그녀 쪽이었다. 왔을 때처럼 가만히 움직여 그녀는 그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때까지도 그는 마치 꽃잎과 함께 얼어버린 것처럼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녀는 그런 그의 앞에 한 무릎을 꿇어 자신을 낮추었다. 그가 고개를 들기만 하면 그녀의 눈을 바로 볼 수 있을 만큼.

  조용히 뻗은 손이 그의 얼굴로 다가갔다. 마치 또 하나의 꽃잎이 얹히듯이, 손끝이 그의 얼굴에 닿고. 그리고 더 다가가지 않았다. 그녀는 그대로 조용히 기다렸다. 자신 또한 그와 함께 그 자리에서 눈에 덮여갈 것처럼.

  몇 닢인지 모를 꽃과 눈이 두 사람에 내린 뒤, 처음으로 그가 움직였다.

  "괜찮아."

  보이지 않는 입술이 먼저 말하고, 그리고 그는 고개를 들었다. 말없이 그를 향해있는 그녀의 시선을 마주해 조용히 웃어보이고, 그는 한 손을 들어 그녀의 손등을 덮었다. 뺨에 닿아있는, 그와 체온이 닮아진 그 손을 그는 가만히 끌어와 손목 안쪽에 입을 맞추었다.

  "나는 괜찮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러했듯이. 단지 자신의 손에 덮인 그의 입술을, 따스하게 퍼져나와 그녀의 언 손을 녹이고 식어져 맺히는 숨결을 느꼈다. 그리고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식을 듯 식지 않고, 내리는 눈송이는 사르르 녹이고 꽃잎만을 그 위에 남기는 그 서늘한 따스함을 어루만지며,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희푸른 눈 위에 떨어진 꽃잎이 눈물처럼 점점이 분홍빛 자욱을 물들이고 있었다.

 

 

  I - S , Another

 

2010-05-01 19:08 에 천수님이 마지막으로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