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개를 길게 젖힌 강민이 강은을 보자마자 인상을 구겼다.
"허강은."
"왜. 허강민."
"그거 내 옷이잖아."
"맞아."
"그런데 왜 네가 입고 있어."
"편해보여서."
"당장 벗어."
"아무리 남매라지만 여자한테 하는 말로는 심한데?"
"내 옷 입고 그 인간 만나는 건 꿈도 꾸지 마."
강은은 어깨를 으쓱하고 도로 방으로 들어갔다.
2.
무열은 강은을 한 번 훑어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은 누구 건가?"
"윤성이요."
"그 친구 확실히 몸이 좋은 모양이구만. 자네한텐 영락없이 푸대자루일세."
강은은 흘러내리는 소매를 다시 접어올리며 싱긋 웃었다.
3.
열쇠를 찾아 가방을 뒤지는데 철컥 하고 문이 열렸다. 벌어지는 틈새로 고개를 내민 것은 윤성이었다. "누나 이제 와?" 한숨이라도 내쉬는 듯 눈썹이 축 처져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현관으로 들어서는 강은을 살펴보고 윤성은 정말로 한숨을 내쉬었다. 목을 감싼 셔츠깃 하며 가디건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실루엣을 보아하니 우려했던 일이 그대로 벌어졌구나 싶었다.
"누나, 기어이 내 옷 입고 갔구나? 내가 말했잖아. 강민 형 거면 몰라도 내 건 너무 커서 진짜 이상해보인다고. 오랜만에 만난다면서 굳이 그걸……"
"그래, 후회했어. 자."
한탄의 한 중간을 자르고 강은이 불쑥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얼떨결에 받아들고 안을 본 윤성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얌전히 개켜져서 들어있는 것은 오늘 하루 그의 옷장에서 실종되었던 바로 그 셔츠였다.
"어? 이게 왜 여기…… 누나 입고 간 거 아니었어?"
"입고 갔어."
"그런데 왜 이렇게 들고 왔어? 설마 싶지만 혹시 새로 산 거야?"
"네 거 맞아. 너무 커서 걸리적거리길래 중간에 벗었어."
"아, 그래? ……뭐라고? 그럼 지금 입은 건 뭔데?"
놀라 돌아보니 강은은 마침 가디건 단추를 풀어헤치고 있었다. 앞섶이 벌어지며 드러난 셔츠를 보고 윤성은 다시 눈을 크게 떴다. 칼라의 크기나 기장으로 보아 ─ 역시나 ─ 남성용인 건 분명했지만, 누이가 지금 걸치고 있는 셔츠는 그가 본 적이 없는 새 것이었다.
낯설음이 너무 강해서 윤성은 그 셔츠가 새 것이라기엔 썩 길이 들어있음을 알아채지 못했다. "샀어?"
"아니."
"그럼 어디서 난 거야?"
"받았어."
"누구한테?"
강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입꼬리를 살짝 당겼다. 살풋 가늘어진 눈이 안경 너머에서 호선을 그렸다. 의미심장한 표정이었다. 어리둥절해하던 윤성의 머리에 문득 어떤 가능성이 스쳐지나갔다. 직후 거실에는 비명이 울렸다. "누나!! 설마!"
"조용히 해. 부모님 깨실라."
"아니 그렇지만……! 설마! 아닌 거지? 그렇지? 누나!"
계단을 오르던 강은이 미간을 찌푸리며 돌아보았다. "호들갑 떨지 마. 네 말대로 영 못 봐주겠다면서 빌려주신 거야. 빨아서 다시 갖다줘야 해."
"그러니까! 별 일 없었단 거지?"
"있었으면?"
"누나!!"
빽 고함을 치는 윤성을 내버려두고 강은은 어깨를 으쓱하며 위층으로 올라가버렸다. 남겨진 윤성은 머리를 감싸쥐고 '그때 찬성하지 말아야 했나' 같은 소리를 한참 동안 중얼거리고 있었다.
4.
장롱을 뒤적거리던 무열이 오, 소리를 냈다.
"이게 있었구만."
식탁 의자에 앉아있던 강은이 고개를 돌려 무열이 들고 온 것을 보았다. 뒷판에 좌우 한 줄씩 주름을 넣고 허리에는 교묘하게 라인을 잡은 하얀 클래식 셔츠였다. 곧게 뻗어나가다가 각을 지며 꺾이는 선이 시원하면서도 놀랍도록 단정했다.
강은이 물끄러미 셔츠를 바라보고만 있자 무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맘에 안 드나?"
"빌려입는 건데 호오를 따질 수는 없죠."
"그건 결국 맘에 안 든다는 소리구만."
혀를 쯧 차는 무열에게 그게 아니라고 고개를 저어보였다. "아니, 심플해서 좋아요. 단지……." 검은 눈이 가늘어지며 셔츠에서 무열의 얼굴로 초점을 옮겼다.
"……이런 옷도 갖고 계실 줄은. 조금 의외라서."
"이래봬도 내가 우리 서에서 옷 잘 입기로 소문난 사람일세. 패셔니스타 하 팀장이라고, 못 들어봤나?"
"패셔니스타는 모르겠고, 40 가까이 먹어서 흰 티에 청바지에다 라이더 하나 덜렁 걸치는 용감한 형사님은 아는데요."
"남자 만나러 오면서 가운마냥 펑퍼짐하게 남동생 셔츠나 걸치고 오는 사람은 어떻고?"
잠시 시선이 맞붙었다. 똑같이 가늘게 뜬 눈으로 무열은 내려다보았고, 강은은 올려다보았다. 팽팽하던 대치상태는 무열이 못 이기는 척 어깨를 으쓱하면서 종료되었다.
"원, 역시 못 봐주겠군. 됐으니 들어가서 이거나 입어보게."
옷걸이 채로 내민 셔츠를 강은도 군말 없이 받아들었다. 여자가 방으로 들어가고, 남자는 여자가 앉아있던 의자에 자리잡았다.
몇 분 기다리자 문이 다시 열렸다. 강은은 바로 다가오지 않고 문턱을 밟고 섰다. 쓱 보니, 여전히 어깨가 남고 길이는 허벅지를 덮었지만, 허리 쪽이 그나마 조금 더 타이트해서 아까보다는 맵시가 났다. 넓게 벌어진 칼라를 만지작거리며 눈으로 물어오는 강은에게 무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군. 잘 어울려."
강은도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걸어와 맞은 편에 앉자 무열이 다시 물었다. "불편하지는 않나?" 이번에는 고개를 저었다. 선이 좀 더 몸에 맞아서 그런지 훨씬 동작이 편했다.
평소처럼 막 접을 수 없어 손등을 덮도록 내버려둔 소맷단을 만지작거리다가 강은이 불쑥 물었다.
"이거, 누님이 맞춰주신 거죠?"
만족스럽다는 듯 웃고 있던 무열이 한 쪽 눈썹을 쳐올렸다. "어떻게 알았나?"
"안쪽에 이니셜이 박혀있더군요. HMY." "계속해보게." "……공동보관하는 유니폼이 아닌 이상 기성복에는 굳이 이름을 새길 필요는 없죠. 만약 새겨야 한다면, 그건 이 옷이 도착할 사람을 구별해야 하거나, 이름을 남기고 싶을 정도로 특별하게 생각하는 경우. 전자라면 쪽지만 붙여도 충분하니 이 경우에는 후자가 더 큰 이유가 되겠네요. 거기다 감이나 디자인도 왠지 고급스럽고, 치수도 특정인에게 맞춘 느낌이 나요. 그러니 주문 제작. 그럼 누가 맡겼을까? 형사님은 직접 옷을 맞춰 입을 정도로 섬세하고 한가한 사람은 아니니까 아마 다른 누가 대신 부탁했겠죠? 치수를 알 정도면 아주 가까운 사람일 거예요. 그리고 보통은 여기서 배우자가 나와야 하지만-"
"-나는 아직 미혼이니, 결국 내게 맞춤 옷을 마련해줄 만큼 친밀하고 나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한 명뿐이지. 정확하네. 그건 내가 대학 졸업할 때 누나가 해준 졸업 축하 선물이야."
내내 태연하던 강은이 눈을 크게 떴다.
"그 정도인 줄은 몰랐어요. 그런데 졸업 선물이라면, 혹시 정장이에요?"
"셔츠만 제작이고 재킷이랑 바지는 그냥 양품일세. 누나는 계속 아쉬워했지만 난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지. 그때만 해도 그렇게 넉넉지는 않았거든. ……참,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새삼스럽군."
무열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눈을 굴렸다. 강은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소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런 걸 빌려주는 거예요? 나한테?"
"장롱 속에서 썩어가는 것보다야 이렇게라도 바람 한 번 쐬는 게 낫지. 어차피 지금은 못 입으니 상관도 없고. 돌려줄 때 드라이클리닝이나 한 번 해주게나."
"……고마워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턱수염을 쓰다듬고 있던 무열은 순간 움찔하며 강은을 보았다. 강은은 언제나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무열 앞에 앉아있었다. 잠시 눈이 마주쳤다. 한동안 물끄러미 강은을 보던 무열은, 이내 픽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나가세. 날씨도 좋고, 새 옷도 입었으니 하늘 한 번 봐야하지 않겠나. 하루는 아직 길다네."
강은이 따라 일어서자 무열이 손을 내밀었다. 무심코 손을 내민 강은은 뒤늦게 소매 길이를 떠올리고 아차 싶어 도로 손을 물렀지만 무열은 아랑곳 않고 길게 늘어진 소매 끝에 빠져나온 손끝을 감싸쥐었다. 강은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무열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거, 의외로 귀엽구만. 손 끝만 삐죽 나온 거. 줄리아 로버츠가 왜 리처드 기어 셔츠를 뺏어입었는지 알 것도 같고."
"그 경우는 손이 주안점이 아닌 것 같은데…… 설마 그것 때문에 옷을 빌려준 건 아니겠죠?"
"그랬으면 그냥 푸대자루 쓰고 있게 놔뒀겠지 뭐하러."
말은 그렇게 하면서 무열은 한 손으로는 강은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소매를 한 단 접어올려주었다. 그리고 온전히 드러난 손을 다시 한 번 꾹 감싸쥐었다.